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수로왕릉
사적번호 사적 제73호
위     치 김해시 가락로 93번길 26
사     진  
상세내용 김해의 상징적 문화유적으로서 가락국의 시조대왕인 수로왕의 무덤으로 납릉 이라고도 합니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음력 3월 3일 구지봉에 탄강하여 3월 15일에 즉위함으로써 가락국을 건국하였고 서기 199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혔습니다. 왕릉은 선조 13년(1580년)에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수축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인조 25년(1647년) 능비를 세우고 고종 15년(1878년)에는 숭선전이란 호를 내리고 침묘를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수로왕의 신위를 모신 숭선전에서 춘추로 제향을 올리고 있는데 숭선전 제례는 지방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수로왕비릉
사적번호 사적 제74호
연     대 가야
위     치 김해시 가락로 190번길 1
상세내용 수로왕비는 원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이름은 허황옥입니다. 수로왕 7년인 서기 48년에 16세의 나이로 배를 타고 가락국에 도착하여 왕비가 되었고 서기 18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규모는 길이 18m 폭 6m 높이 약 5m로 현재의 능은 조선 인조 25년(1641년)에 수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왕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중 두 아들을 어머니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구산동 고분군
사적번호 사적 제75호
위     치 김해시 구산동 64번지
사     진  
상세내용 분성산의 서남쪽 기슭에 위치하는 고분으로 현재 2기가 남아있습니다. 이중에서 1919년 조사된 삼산리 1호분은 원형봉토를 가진 석실분으로 동서 2.4m 남북 3m의 장방형이며 연도는 남벽의 서쪽에 달려있는 것으로 밝혀졌 있습니다. 금관가야 멸망후인 서기 6세기 후반경의 무덤으로 당시 김해지역을 다스리던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됩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예안리고분군
사적번호 사적 제261호
위     치 대동면 예안리 369-6
사     진  
상세내용 1976년부터 1980년에 걸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 됨으로써 무덤의 성격이 일부 밝혀지게 된 가야시대 서민계층의 집단 묘역입니다. 지금까지의 조사에 의해 밝혀진 무덤의 형태는 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석실묘 등 매우 다양하며 이런 형태들의 무덤이 모두 300여기나 확인 되었습니다.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 다양하고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100여구의 인골이 발견 되기도 하였습니다. 발굴된 수많은 인골은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형질학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편두의 풍습이 남아 있는 인골도 출토되었습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대성동고분군
사적번호 사적 제341호
연     대 금관가야
위     치 김해시 가야의길 126
사     진  
상세내용 1990년에서 1991년까지 3차에 걸쳐 경성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학술 발굴된 2~6C 금관가야 지배계층의 집단묘역으로 목관묘 목곽묘 석곽묘 석실묘 옹관묘 등 다양한 묘제의 무덤이 조사되었습니다. 특히 금관가야의 지배계층 묘로 보이는 목곽무덤에서 풍성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기마군단을 가진 가야문화의 실체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 되었으며 후한대의 중국제 거울을 비롯하여 일본의 고분에서 보이는 통형동기 파형동기 등이 출토되어 한·중·일 삼국간의 문물교류 상황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5. 8. 13:50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보물-선조국문교서
사적이름 보물 제951호
연     대 조선[선조]
위     치 경남 김해시 흥동 424(부산시립박물관 보관)
사     진  
상세내용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하여 의주에 있을 적에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로 쓴 교서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그 때문에 선조는 일반대중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선조가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기 한 달 전에 내려진 것인데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 명을 구해 나왔습니다. 그 후 이 교서는 권탁의 후손 집에서 보관하다가 도둑을 맞고 다시 찾은 것입니다.
어쩔수 없이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한 내용들이 실려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과 한글로 쓰여 진 점에서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보물-묘법연화경(권4~7)
사적번호 보물 제961-1호
연     대 조선시대
보관위치 김해시 대동로 529번길 83 원명사
사     진  
상세내용 묘법연화경은 줄여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처가 되는 길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을 중심사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화엄경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사상 확립에 크게 영향을 끼친 경전입니다.

묘법연화경 중 권4에서 권7에 해당하는 이 책은 태종 5년(1405)에 성달생·성개 형제가 죽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옮겨 적은 불경을 신문(信文)이 목판에 새겨 찍어낸 것입니다. 닥종이에 찍은 목판본으로 4권을 하나의 책으로 엮었으며 책의 크기는 세로 26.8㎝ 가로 16㎝입니다.

2004년 10월 서울에 거주하는 이경희씨가 대동면 원명사(주지 : 박형국)에 기증하였습니다.

보물 제961호(1998.12.28)에서 경남 창원 맹인호 소장 ‘묘법연화경 권 4~7’이 보물 제961-2호로 추가지정 됨에 따라 지정번호가 변경되었습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봉황동 유적
사적번호 사적 제2호
연     대 가야시대
위     치 봉황동 253번지 일원
사     진  
상세내용 가야시대의 대표적인 조개무지로서 1920년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로 발굴 조사된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구 문화재 자료 제87호)가 합쳐져 2001.2.5 사적으로 확대 지정된 유적입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AD 9~22)의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구릉위에는 황세 장군과 여의낭자 전설에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들이 발굴되기도 하였습니다. 1999년 3월 부산대 박물관에서 회현리 패총을 재발굴하고 발굴단면은 시청 현관에 전시하였습니다.
2002~2003년 고상가옥 수혈주거 망루 목책 등을 복원 정비하였습니다.
2006. 10. 13 패총단면 전시관도 개관하였습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분산성
사적번호 사적 제66호
연     대 고려
위     치 김해시 가야로 405번안길 210-162
사     진  
상세내용 고려 우왕 3년(1377년) 박 위 부사가 왜구를 막기 위해 축성한 뒤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던 것을 고종 8년(1871년) 정현석 부사가 개축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의 기초 선정방법이 삼국시대 산성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소위 테뫼식을 따르고 있음을 볼 때 최초 축성연대는 가야시대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곽의 길이는 총 929m 평균 폭은 약 8m입니다. 현재 남북의 2개 문지와 서편의 암문 우물지 등이 남아 있으며 97년 복원된 봉수대가 있습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5. 6. 13:38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봉화산 마애불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40호
연     대 고려시대
위     치 김해시 진영읍 장방로 136-200
사     진  
상세내용 고려시대의 여래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높이 2.48m 무릎높이 1.7m입니다. 광배는 없으나 균형 잡힌 콧등과 조그마한 입 어깨까지 늘어진 커다란 귀 등이 세련된 조형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설이란 기록을 보면 당나라 황후의 꿈에 한 청년이 자주 나타나서 괴롭힘으로 신승의 힘으로 바위틈에 넣어서 김해 땅 봉화산의 석불로 만들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어 흥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능동석인 및 상석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71호
연     대  
위     치 김해시 삼문동 산 49-2
사     진  
상세내용 현지에서는 가락국의 왕릉이라고도 하고 혹은 조선 초기의 사대부 묘라고도 전해오고 있는 봉토분의 앞에 세워진 문인 상 2기와 상석으로 무덤의 주인은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관모를 쓰고 양손에 홀을 쥐고 있는 조각수법으로 보아 석인상은 조선시대 문인 상이며 상석 또한 중후한 점이 조선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초선대 마애불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78호
연     대  
위     치 안동 685-1
사     진  
상세내용 가락국의 2대왕인 거등왕이 철점산의 선인을 초대하여 금과 바둑으로 서로 즐겼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초선대의 암벽에 얕은 선각으로 새겨진 불상으로 일명 거등왕의 초상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가 신체에 비해 너무 크고 표현이 간략하게 된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아미타 마애불로 추정됩니다. 크기는 높이 5.1m 어깨폭 2.5m로 김해지방에서 가장 큰 불상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구산동 마애불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186호
연     대  
위     치 구산동 산 2번지
사     진  
상세내용 이 불상은 암벽의 한 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선각한 것으로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 하였습니다. 머리에는 육계가 솟아 있으며 갸름한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이 얕게 새겨졌 있습니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무릎의 폭이 안정되어 강건한 느낌을 주는데 오른손은 가슴 위로 들어 올리고 왼손은 왼쪽 무릎에 대고 있어 아미타불로 생각되며 선각으로 불상을 처리한 수법이나 조각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김해향교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217호
연     대 조선시대
위     치 김해시 가락로 150번길 21
사     진  
상세내용 조선시대 관학 교육기관으로 유학을 가르치던 곳인데 현재의 중등교육기관에 해당됩니다. 김해향교는 선조말기(1602~1604년)에 대성전이 건립되고 인조초기(1625~1629년)에 동ㆍ서무와 대성전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이 향교의 주산이 무너져 숙종 14년(1688년) 현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숙종 15년(1689년) 동ㆍ서재를 동 18년(1692년)에 신주를 건립하였으며 동 19년(1693년) 명륜당과 남루를 건립하여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공자를 중심으로 5성위 18현의 얼을 모시고 있습니다. 음력 2월 초정일과 8월 초정일에 이 분들에 대한 제례를 대성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5. 5. 13:57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구지봉
사적번호 사적 제429호
연     대 신라
위     치 구산동 산 81-2번지
사     진  
상세내용 이곳은 신라 유리왕 19년(42년)에 하늘에서 6개의 황금알이 담긴 금 상자가 내려오고 그 알 속에서 김수로왕을 비롯한 6가야의 시조 왕들이 태어났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 곳으로 가야문화의 출발지 이자 고대 국문학상 중요한 서사시인 "구지가"가 남아 있는 곳입니다.

2001년 3월 7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습니다. 원래는 거북이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이라 불리었는데 현 수로왕비릉이 있는 평탄한 위치가 거북의 몸체이고 서편으로 쪽 내민 것이 거북의 머리모양입니다. 1908년 참봉 허선이 세운「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란 석비가 있으며 석비의 남동쪽에 있는 지석묘의 상석위에 「구지봉석」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사적-양동리고분군
사적번호 사적 제454호
위     치 주촌면 양동리 산 3번지
사     진  
상세내용 가곡부락 뒷산에 위치한 양동고분군은 삼한 및 삼국시대 무덤 유적지로 전체규모는 약 3만평으로 추정되며 김해에서는 가장 큰 규모입니다.
이 고분군은 지하에 무덤이 중복된 상태로 조밀하게 설치되어 매우 복잡한 배치상태를 보여주며 시기적으로 가야시대 전 기간 동안 걸쳐 조성되었음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졌습니다. 가야철기의 우수성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토기 청동기 구슬류 등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외국과의 교섭 교역관계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천연기념물-주촌면이팝나무
사적번호 천연기념물 제307호
위     치 주촌면 천곡리 895-3
사     진  
상세내용 물푸레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서 꽃이 피면 쌀밥을 담아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이팝나무라고 합니다. 수령 약 500년으로 높이 17m 지면부의 둘레 6.9m로서 지상 1m 높이에서 2개로 갈라지고 가슴높이 둘레는 동쪽의 것이 4.2m 서쪽의 것이 3.5m로서 매년 5월 중순에서 6월 상순에 걸쳐 꽃이 핍니다.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어 농민들이 무척 좋아하는 나무중의 하나입니다.
제      목 국가지정문화재-천연기념물-신천리이팝나무
사적번호 천연기념물 제185호
위     치 김해시 한림면 김해대로 1472번길 7 인근
사     진  
상세내용 수령 600년으로 높이 15m 둘레 3.5m이며 매년 섣달그믐에 용왕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나무 꽃이 잘 피면 풍년이 들고 시름시름하면 한발이 오고 잘 피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전하며 하얀 꽃이 마치 흰 쌀밥 같다하여 이팝나무라고 합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안곡리 3층석탑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24호
위     치 김해시 한림면 안곡로 492번길 87
사     진  
상세내용 안곡리 폐사지에 있는 석탑으로서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있습니다. 탑의 기단부는 매몰되었고 옥개석 3매와 옥신석 1매만 남아 있는데 탑의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며 잔존하는 탑의 높이는 2.12m입니다. 특히 1층 옥신석에는 문짝이 4면에 새겨져 있다. 2001년 복원 정비하였습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5. 4. 13:54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은하사 대웅전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238호
위     치 김해시 신어산길 167
사     진  
상세내용 전설에 의하면 가락국 수로왕 때 장유화상이 창건한 사찰로 원래의 이름은 서림사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절 건물 전부가 불에 타 소실되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다포계 양식의 맞배집으로 용두와 봉두를 새겨 놓아 화려하게 장식하였는데 이들 조각과 구조수법으로 보아 조선조 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웅전의 수미단에 쌍어문양이 있어 인도 아유타국과의 관계를 전하고 있습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서강 김계금 일고책판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352호
연     대 조선시대
위     치 김해시 진영읍 진영로 430-16
사     진  
상세내용 조선전기의 유학자 서강 김계금 선생의 언행과 업적 관련기록 등을 후손들이 모아서 편찬한 목판으로 1850년 제작 되었습니다. 표지를 포함한 총 26장의 책판 전부가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고 있어 조선후기 목판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현재 진영 신용리에 있는 미양서원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은하사 대웅전 벽화
사적번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2호
위     치 김해시 신어산길 167
사     진  
상세내용 벽화는 은하사대웅전(도유형문화재 제238호)내부 벽면전체에 그려져 있으며 주제는 삼세불 아미타내영 보살상 나한상 신장상 도인상 모란 등으로 총 32점이 있습니다.
전각내의 좌우측 중심벽화인 삼불회도와 아미타내영도는 다른 벽화 간에 기법상 차이가 있는데 다른 벽화보다 시기가 다소 앞서는 것으로 보이며 조선후기 18세기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세불 벽화는 대웅전 본존을 중심으로 좌측 벽면에 녹청안료를 전체적으로 펴 바르고 석가여래 입상을 중심으로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좌우에 배치하였으며 육신부는 백색으로 육신선은 주색선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김해 원명사 예수시왕생칠재의찬요 1권
사적번호 도유형문화재 제515호
위     치 김해시 대동면 대동로529번길 83
사     진  
상세내용 1632년(崇禎五年壬申) 경상도 청도지 구룡산 수암사 개간본으로 조선 후기 예수재 의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11. 9. 8)

 

제      목 도지정문화재-무형문화재-숭선전제례
사적번호 도무형문화재 제11호
위     치 가락로 93번길 26
사     진  
상세내용 숭선전은 수로왕과 수로왕비의 신위를 봉안하고 향화를 받드는 전각으로 고종15년(1878년)에 건립되었습니다.
이 전각은 국조 단군과 고구려 시조 동명왕을 모신 숭영전 기자의 숭인전 신라 시조 혁거세왕의 숭덕전 탈해왕의 숭신전 알지왕 문무왕 경순왕의 숭혜전 백제 시조 온조왕의 숭열전 고려 시조왕의 숭의전과 함께 팔전의 하나입니다. 대제는 춘추향 2회로 춘향은 음력 3월 15일 추향은 음력 9월 15일이며 시간은 상오 10시부터 약 1시간동안 거행됩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5. 2. 14:04

제      목 도지정문화재-기념물-서상동 지석묘
사적번호 도 지정기념물 제4호
위     치 김해시 가락로 108-7
사     진  
상세내용 청동기시대의 전형적인 남방식 지석묘로 무덤의 주체는 땅 속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석묘에는 돌칼 돌화살촉 무문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길이가 4.6m나 되는 큰 상석 위에는 임진왜란 당시 사충신의 한분인 송 빈 선생이 이곳에서 순절한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기념물-유하패총
사적번호 도 지정기념물 제45호
연     대 4~5세기
위     치 김해시 유하동 183번지 외
사     진  
상세내용 하손부락 뒷산의 동남단에 형성되어 있는 유하패총은 가야시대 사람들이 조개를 잡아먹고 버린 조개껍데기 생선뼈 동물뼈 등과 당시 사람들이 쓰던 각종 토기나 도기들이 그대로 묻혀 쌓여 있는 곳입니다. 정식으로 발굴조사가 되지 않아 정확한 유적의 성격은 알 수 없으나 넓은 범위에 걸쳐 있으며 지표면에 흩어져 있는 토기편들로 보아 가야시대인 4~5세기 때의 패총으로 보입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기념물-양동산성
사적번호 도 지정기념물 제91호
연     대 가야시대
위     치 주촌면 양동리 산 39-1
사     진  
상세내용 양동리와 내삼리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331m의 산봉우리를 두른 테뫼식 산성으로 일부는 흙으로 쌓고 일부는 대강 다듬은 할석으로 쌓았으며 마을이름을 따라 양동산성 내삼성 이라고도 불리고 가곡산성이라고도 합니다. 가야시대에 쌓여서 계속 수리되어 사용된 듯하며 둘레 약 800m이고 성벽 높이는 2.5m에 두께 5m로 협축하였던 부분이 허물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의 문터에는 초석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우물터의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기념물-내동 지석묘
사적번호 도 지정기념물 제97호
위     치 김해시 금관대로 1265번길 4-1
사     진  
상세내용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대단위 주택지로 변모한 지역인 내동에서 발견된 내동 지석묘는 ‘95년 동의대에서 발굴조사한 후 상석은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 이전 되어 있습니다. 내동 지석묘는 상석과 지석 개석 및 하부 석곽을 갖춘 형식으로 내부 바닥에는 소형 널빤지 꼴의 할석을 깔아 시상대를 만들었습니다. 홍도가 1점 출토되어 매장과 관련된 의례행위가 이루어졌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제      목 도지정문화재-기념물-칠산동 고분군
사적번호 도 지정기념물 제98호
위     치 김해시 금관대로 838번길 15-28
사     진  
상세내용 칠산 남단의 해발 90m정도의 정상부 주변에 두 곳으로 나누어져 형성되어 있는데 북쪽에는 10여기의 큰 수혈식 석곽묘군이 남쪽에는 수십 기의 작은 수혈식 석곽묘와 목곽묘가 혼재하고 있음이 1987년 경성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3~4세기의 목곽묘에서 4~5세기의 석곽묘로 변화하는 가야묘제 변천상을 잘 알 수 있는 유적입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4. 29. 14:07

제      목 문화유적-선사유적-대성동 소성유적
사적이름 선사유적
연     대 청동기
위     치 김해시 북부동(대성동)203, 204, 225-3
사     진  
상세내용 김해 대성동 소성유적에서는 무문토기 말기에 해당하는 소성유적(燒成遺蹟)과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溝) 및 도로 소형 석곽묘 1기가 확인되었습니다. 특히 소성유구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토기를 소성한 소성갱으로서 벽체 등의 상부구조나 일부 화구부가 예상됩니다. 그러나 유구의 삭평이 심하여 잔존상태가 양호치 못한데다가 주변 지역으로의 확장할수없어 유구의 정확한 성격을 규명하기가 힘든 상태입니다.

 

 

제      목 문화유적-사지-영구암지
사적이름 사지
연     대 미상
위     치 김해시 삼안동(삼방동) 산 14
사     진  
상세내용 삼안동 산중턱에 세운 암자로서 수로왕 당시 창건한 것으로 전하나 정확하지 않습니다. 현존 건물은 현대에 축조한 것으로 목조와가 팔작 지붕입니다. 암자지(庵子址)로 추정될 뿐이며 경내에 탑재 일부를 이용하여 조립한 석물이 있습니다.

 

 

제      목 문화유적-사지-동림사지
사적이름 사지
연     대 삼국
위     치 김해시 삼안동(안동) 어방산 남쪽 경사
사     진  
상세내용 가락국 초기에 장유화상(長遊和尙)에 의해 서림사(四林寺)와 함께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김해읍지(金海邑誌)』등의 기록에 사명(寺名)조차 나와 있지 않아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습니다. 서역불교의 번성을 기원하는 뜻의 서림에 대해 동림이라 한 것은 이 곳이 가락국의 안존과 번영을 염원하는 뜻이라고 전해져 옵니다. 또한 현재 은하사(銀河寺) 자리에 있었던 서림사와 이 동림사는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동림사지는 은하사에서 동쪽으로 약 1km정도 떨어져 있으며 계곡 사이의 협소한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지는 북에서 남으로 낮아지는 좁은 구릉에 3단으로 조성된 것 같고 북쪽 제1단이 금당지(金堂址) 제2단 좌우에 천불전(千佛殿)을 비롯한 2동의 건물이 각각 있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수년 전까지만 해도 수십개의 초석(礎石)이 남아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유실되었습니다.

 

제      목 문화유적-사묘-관천재
사적이름 사묘
연     대 조선
위     치 김해시 삼안동(삼방동) 599
사     진  
상세내용 임진왜란때 김해 사충신의 한 사람인 이대형(李大亨)이 생존시 축조한 서재이다. 1969년 사라호 태풍으로 붕괴한 것을 1974년 문중에서 중건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 단층 목조와가입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4. 24. 14:35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봉황동 조개더미①
사적번호 조개더미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회현동(봉황동) 401
사     진  
상세내용 봉황대(鳳凰臺)의 북쪽 기슭에 민가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가 개설되면서 지하의 패각이 노출되어 발견된 것입니다. 도로개설 당시 채집된 유물에 의하면 인접한 회현동조개더미와 동일 문화양상을 띠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즉 김해식토기라고 부르는 회청색 연ㆍ경질토기편과 적갈색 연ㆍ경질토기편 그리고 방추차 어망추 녹각재도자병 토재곡옥 소도자 탄화미 복골편(鹿角製刀子柄 土製曲玉 小刀子 炭火米 卜骨片)등이 그렇습니다. 패각의 퇴적층위는 주로 백합 껍질로 단순층으로 여겨지며 두께는 약 1.5m 정도입니다. 규모는 확실치 않으나 소규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은 출토된 유물의 특징으로 보아 2-3세기경에 해당합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봉황동 조개더미②
사적번호 조개더미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회현동(봉황동) 360
사     진  
상세내용 봉황대(鳳凰臺)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현재 패각 상부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노출된 부분은 얼마되지 않아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습니다. 표토층에서 채집된 자료에 의하면 패각은 굴과 백합 껍질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유물은 주로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는데 내용은 봉황동조개더미①과 동일합니다. 이 조개더미의 형성 시기 역시 2~3세기로 추정됩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봉황동 조개더미③
사적번호 조개더미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회현동(봉황동) 336, 337
사     진  
상세내용 경작지기 때문에 유적의 대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본래는 패각을 봉황대가 있는 정상부에서 서쪽 경사면을 향해 버린 듯하나 정상부의 경사가 심해 중간 부분에서 퇴적되었다. 채집자료에 의하면 패각은 굴껍데기가 대부분이며 토기편은 봉황동 조개더미①②와 같습니다. 그리고 간혹 기와편도 흩어져 있어 조개더미 퇴적 이후 이 일대에 건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현재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남아있는 패각층 출토의 토기 특징으로 보아 2~3세기 경으로 추정됩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봉황동 조개더미④
사적번호 조개더미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회현동(봉황동) 140,144
사     진  
상세내용 봉황대 남쪽 경사면 기슭의 봉황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신축 당시 많은 패각과 토기편들이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현재 패각층이 남아 있는 부분은 봉황초등학교 건물 서쪽 끝의 뒤편 언덕과 그 주위며 그 규모는 인접한 회현리 조개더미와 거의 비슷합니다. 이곳에서 채집된 자료는 대부분 굴껍데기와 봉황동 조개더미①②③과 동일한 토기편들인 것으로 보아 같은 시기의 유적으로 추정됩니다. 어쨌든 이 봉황동 일대는 중간에 우뚝 솟은 봉황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조개더미가 무질서하게 분포되어 있어 가락국 (駕洛國) 초기에 이곳이 생활 중심지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제      목 문화유적-탑-파사석탑
사적번호 탑(문화재자료 제227호)
연     대 미상
위     치 김해시 북부동(구산동) 119-3
사     진  
상세내용 김수로왕비릉 경내에 있으며 수로왕비가 이곳에 올때 타고 온 배의 닻돌이라고 전해지는 것으로 파사석탑이라고도 합니다. 이 석탑은 석재를 다듬은 것이 아니라 자연석을 쌓은 것입니다. 경내에 파사석탑의 파편이라고 하는 것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삼국유사』권제3의 탑상(塔像) 제4에 보이는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의 내용을 떼어다 붙인 자연석의 파편으로 보입니다.

 

제      목 문화유적-선사유적-지내동 옹관묘지
사적번호 선사유적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불암동(지내동) 산 4
사     진  
상세내용 이곳은 현재 부산시의 경계가 되는 불암동 선암마을에서 서쪽으로 약 1km되는 거리의 해발 10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과거 낙동강의 본류가 지금과 달리 선암마을 앞으로 흘렀을 때는 서부 경남 지역 주민들을 양산ㆍ부산으로 실어 나르는 항구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현재에도 부산을 연결하는 국도와 고속도로가 모두 이곳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4. 21. 14:33

제      목 문화유적-고분-두곡유적
사적번호 고분
연     대 삼국
위     치 김해시 북부동(삼계동) 산 54-1, 140, 150일대
사     진  
상세내용 이 유적에서는 삼국시대 분묘 73기 탄요 1기 조선시대 건물지 1개소등 총 75기의 유구가 확인 조사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422건 480점으로서 이들은 모두 삼국시대 분묘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유구는 구릉의 전면에 걸쳐 73기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들을 내부 구조별로 나누면 목곽묘 8기 수혈식석곽묘 58기 옹관묘 3기 토광묘 1기 기타 3기로서 수혈식석곽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석곽묘의 경우 그 규모는 대체로 장벽(長壁) 2~3.5m 단벽(短壁) 0.45~0.7m인 중소형급이며 주로 괴석 또는 할석으로써 수단(數段)으로 쌓아 올려 완성하였으나 단벽의 경우 할석 1~2매로써 수적(垂積)한 예가 많다. 분묘군에서는 393점의 유물 이외에도 수습유물 76점 채집유물 11점 등 총 480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토기류는 5C 전반과 6C 초기경의 유물이 대부분입니다. 이 가운데 5C전반은 부산 김해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류[무개식무투공고배(無蓋式無透孔高杯) 발형기대(鉢形器臺) 유개대부파수부곤 광구소곤(廣口小곤) 광구장경곤(廣口長頸곤) 등]가 주류지만 5C후기 이후의 토기는 거의 신라계 토기입니다. 본 고분군에서 조사된 수혈식석곽묘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들은 당시의 이 지역 중심세력에서 벗어난 소집단의 묘제상을 살피는데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칠산동 조개더미①
사적번호 원삼국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칠산동(명법동) 산 18-3
사     진  
상세내용 화목동(花木洞) 조개더미의 서남쪽 약 500m 지점 서쪽 계곡의 정상부 가까운 고지에 위치합니다. 유적의 중심부가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 되면서 파손되어 버리고 현재는 패각과 토기편들만 지표에 흩어져있습니다. 주위에서 수습된 자료에 의하면 패각은 굴과 백합껍질이 대부분 이며 토기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적갈색 연질토기편들입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칠산동 조개더미②
사적번호 조개더미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칠산동(명법동) 산 18-3
사     진  
상세내용 이 조개더미는 칠산 남서쪽의 남쪽 경사면 중턱에 위치합니다. 주위는 경작지로 개간되었고 패각은 모두 담수패(淡水貝)인 재첩 껍질이며 조선시대 중기의 백자편이 많이 혼입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 중기 이후에 현재의 취락지보다 약간 높은 칠산(七山)의 중턱에 마을이 있 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삼계동 조개더미
사적번호 조개더미
연     대 삼국
위     치 김해시 북부동(삼계동)
사     진  
상세내용 일본강점기에 조개더미의 존재가 확인된 곳으로 지금은 지형의 변화로 감실되었습니다. 삼국시대의 토기가 출토되는 조개더미로 추정됩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사적번호 조개더미(사적제2호)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회현동(봉황동) 253
사     진  
상세내용 이 유적은 낙동강 하류의 충적평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높이 7m 동서 길이 약 130m 남북 너비 약 30m의 낮은 구릉위에 형성된 조개더미로 남부지방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1907년에 발견되어 1920년에 1차 발굴되었고 이 당시의 행정구역에 따라 회현리 조개더미로 명명되었습니다. 1992년에 회현리 조개더미가 있는 봉황대(鳳凰臺) 주변에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20년 발굴을 통해 왕망(王莽)의 화천(貨泉)이 발견되었다. 왕망의 화천은 중국 전한과 후한 사이의 신대(新代)에 사용되었던 화폐로 이 유적의 연대를 기원전후한 시기까지 올려보고 있습니다. 최근 회청색연질토기(灰靑色軟質土器)시대의 설정을 주장하는 논리와 함께 이 유적의 상한연대를 3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도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발견된 탄화미는 고대미(古代米) 연구의 중요자료로서 우리나라의 도작사(稻作史)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1934년의 조사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석관묘(石棺墓) 옹관묘(饔棺墓) 등이 발견되어 조개더미가 형성되기 이전의 고인돌 및 석관묘 유구와 그 이후의 원삼국시대 조개더미가 중첩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때 발견된 왕망의 화천과 김해식 옹관은 이 지역이 원삼국시대에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교역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992~1993년에 실시된 봉황대 일원에 대한 조사에서는 조개더미와 주거지 폐기장 유물포함층 등이 확인되었는데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확인된 조개더미는 A.D 3~6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군집을 이루는 주거지는 3~6세기대의 장기간에 걸쳐 축조된 것입니다. 유적의 규모는 5098㎢ 입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4. 19. 14:30

제      목 문화유적-불상-미륵암 마애석불
사적번호 불상
연     대 미상
위     치 김해시 불암동
사     진  
상세내용 원래 불암동에 있던 것이 남해고속도로 공사시 파괴되어 현재 동상동의 불교 포교원 내에 옮겨져 있습니다. 화강암에 새긴 마애불로 안면부가 파손되어 형태는 확실치 않지만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진 모습입니다. 눈은 반개(半開)하고 짧은 목에 삼도의 흔적이 있고 통견의 의습선은 뚜렷하나 전체적으로 부자연스럽습니다. 오른손은 노출되었으나 팔목 이하는 소실되었습니다. 두광을 새긴 선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족부(足部) 이하는 마멸되었습니다. 현고(現高) 약 80cm 견폭(肩幅) 65cm입니다. 현재는 이곳에 미륵암에서 지어 놓은 불전(佛殿)에 보존되어 있으며 보존상태는 양호한편 입니다.

 

제      목 문화유적-불상-초선대 마애석불
사적번호 불상
연     대 고려
위     치 김해시 삼안동(안동) 685-1
사     진  
상세내용 이 마애불은 초선대 서쪽 끝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거대한 자연 암벽에 3cm 정도 굵기의 선으로 음각되어 있습니다. 넓적한 얼굴에 가로로 찢어진 듯한 눈 두툼한 입술 표현 등은 고려시대의 거불(巨佛)에서 볼 수 있는 표현입니다. 귀는 어깨에 닿지 않으며 목에는 형식적으로 삼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법의는 통견으로 양쪽 어깨에서부터 몸 전체에 세로로 물결식의 옷주름선을 새기고 있습니다. 광배는 내부에 장식 문양이 없는 주형거신광이다. 전체적으로 고려시대의 거불양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형문화재 제78호

 

제      목 문화유적-고분-김해 칠산동 고분군
사적번호 고분(기념물 제98호)
연     대 삼국
위     치 김해시 칠산동(명법동) 산 18-3
사     진  
상세내용 고분군은 동북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은 칠산(七山)의 중심부 즉 명법 1구 마을 뒤쪽 해발 100m 전후의 산마루를 중심으로 145546㎡의 범위에 널리 분포해 있습니다. 1987~1988년 2회에 걸쳐 경성대학교 박물관이 조사하였습니다. 1차는 ⅠㆍⅡ지구를 2차는 ⅢㆍⅣ지구를 조사하였으며 모두 122기의 분묘가 확인되었습니다. 유구는 토광목곽묘와 수혈식석실분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토광목 관묘 옹관묘 등의 묘제도 혼재되어 있습니다. 토광목곽묘 중 이른 시기의 것은 바닥이 얕고 묘광이 넓은데 비해 연대가 내려올수록 바닥이 깊어지고 묘광 폭이 좁아지는 변화가 보입니다. 그리고 수혈식석실분은 매장주체부가 지하식이고 길이에 비해 폭이 넓고 천정돌은 없습니다. 천정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무로 된 천정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수혈식석실분 가운데서도 돌로 천정을 만들었던 묘제보다 시기적으로 약간 앞서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이 유적에서 확인되는 토광목관묘는 바닥이 얕고 세장한 것이 특징이며 원삼국시대의 목관묘와는 구조적으로나 출토유물상에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칠산동 고분군은 시기적으로 4~6세기대의 가야묘제나 유물의 변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입니다.

 

제      목 문화유적-고분-김해 구산동 고분군①
사적번호 고분(사적 제75호)
연     대 삼국
위     치 김해시 북부동(구산동) 63, 64
사     진  
상세내용 이 고분군에는 2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는데 2기 모두 원형 봉토를 하고 있습니다. 봉토의 크기는 1기는 지름 12.8cm에서 1.5m 높이 4m로 거대하고 다른 1기는 봉토가 절반 정도만 남아 있습니다. 이 가운데 1기는 지상에서 개석이 노출되어 있고 주체부의 한쪽 벽이 파괴 되어 내부가 들여다보입니다.

 

제      목 문화유적-고분-화정 고분군
사적번호 고분
연     대 삼국
위     치 김해시 북부동(삼계동) 화정마을
사     진  
상세내용 이 유적은 분성산이 서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합니다. 현재는 부산외국어대학교의 이전부지로 되어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진행 중입니다. 유구는 횡혈식석실분과 황구식석실분이 주류를 이루며 수혈식석곽도 있습니다. 비교적 규모가 큰 횡혈식 또는 횡구식석실분에는 유구 주위로 주구를 돌렸으며 출토 유물은 단각고배를 비롯한 비교적 늦은 시기의 토기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유구와 출토유물로 보아 시기는 6~7세기로 추정됩니다. 바로 남쪽에 위치한 구산동 고분군과 함께 이 유적은 김해지역에서 시기가 가장 떨어지는 고분군으로 이 시기의 문화상을 규명할 수 있는 유적으로 판단됩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4. 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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