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문화유적-고분-두곡유적
사적번호 고분
연     대 삼국
위     치 김해시 북부동(삼계동) 산 54-1, 140, 150일대
사     진  
상세내용 이 유적에서는 삼국시대 분묘 73기 탄요 1기 조선시대 건물지 1개소등 총 75기의 유구가 확인 조사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422건 480점으로서 이들은 모두 삼국시대 분묘에서 출토되었습니다. 유구는 구릉의 전면에 걸쳐 73기가 확인되었습니다. 이들을 내부 구조별로 나누면 목곽묘 8기 수혈식석곽묘 58기 옹관묘 3기 토광묘 1기 기타 3기로서 수혈식석곽묘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석곽묘의 경우 그 규모는 대체로 장벽(長壁) 2~3.5m 단벽(短壁) 0.45~0.7m인 중소형급이며 주로 괴석 또는 할석으로써 수단(數段)으로 쌓아 올려 완성하였으나 단벽의 경우 할석 1~2매로써 수적(垂積)한 예가 많다. 분묘군에서는 393점의 유물 이외에도 수습유물 76점 채집유물 11점 등 총 480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토기류는 5C 전반과 6C 초기경의 유물이 대부분입니다. 이 가운데 5C전반은 부산 김해지역의 특징적인 토기류[무개식무투공고배(無蓋式無透孔高杯) 발형기대(鉢形器臺) 유개대부파수부곤 광구소곤(廣口小곤) 광구장경곤(廣口長頸곤) 등]가 주류지만 5C후기 이후의 토기는 거의 신라계 토기입니다. 본 고분군에서 조사된 수혈식석곽묘 중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들은 당시의 이 지역 중심세력에서 벗어난 소집단의 묘제상을 살피는데 다양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칠산동 조개더미①
사적번호 원삼국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칠산동(명법동) 산 18-3
사     진  
상세내용 화목동(花木洞) 조개더미의 서남쪽 약 500m 지점 서쪽 계곡의 정상부 가까운 고지에 위치합니다. 유적의 중심부가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 되면서 파손되어 버리고 현재는 패각과 토기편들만 지표에 흩어져있습니다. 주위에서 수습된 자료에 의하면 패각은 굴과 백합껍질이 대부분 이며 토기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적갈색 연질토기편들입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칠산동 조개더미②
사적번호 조개더미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칠산동(명법동) 산 18-3
사     진  
상세내용 이 조개더미는 칠산 남서쪽의 남쪽 경사면 중턱에 위치합니다. 주위는 경작지로 개간되었고 패각은 모두 담수패(淡水貝)인 재첩 껍질이며 조선시대 중기의 백자편이 많이 혼입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조선 중기 이후에 현재의 취락지보다 약간 높은 칠산(七山)의 중턱에 마을이 있 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삼계동 조개더미
사적번호 조개더미
연     대 삼국
위     치 김해시 북부동(삼계동)
사     진  
상세내용 일본강점기에 조개더미의 존재가 확인된 곳으로 지금은 지형의 변화로 감실되었습니다. 삼국시대의 토기가 출토되는 조개더미로 추정됩니다.

 

 

제      목 문화유적-조개더미-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사적번호 조개더미(사적제2호)
연     대 원삼국
위     치 김해시 회현동(봉황동) 253
사     진  
상세내용 이 유적은 낙동강 하류의 충적평야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높이 7m 동서 길이 약 130m 남북 너비 약 30m의 낮은 구릉위에 형성된 조개더미로 남부지방 원삼국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1907년에 발견되어 1920년에 1차 발굴되었고 이 당시의 행정구역에 따라 회현리 조개더미로 명명되었습니다. 1992년에 회현리 조개더미가 있는 봉황대(鳳凰臺) 주변에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1920년 발굴을 통해 왕망(王莽)의 화천(貨泉)이 발견되었다. 왕망의 화천은 중국 전한과 후한 사이의 신대(新代)에 사용되었던 화폐로 이 유적의 연대를 기원전후한 시기까지 올려보고 있습니다. 최근 회청색연질토기(灰靑色軟質土器)시대의 설정을 주장하는 논리와 함께 이 유적의 상한연대를 3세기 이후로 보는 견해도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발견된 탄화미는 고대미(古代米) 연구의 중요자료로서 우리나라의 도작사(稻作史)연구에 귀중한 자료입니다. 1934년의 조사에서는 지석묘(支石墓) 석관묘(石棺墓) 옹관묘(饔棺墓) 등이 발견되어 조개더미가 형성되기 이전의 고인돌 및 석관묘 유구와 그 이후의 원삼국시대 조개더미가 중첩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때 발견된 왕망의 화천과 김해식 옹관은 이 지역이 원삼국시대에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국제교역의 중요한 길목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992~1993년에 실시된 봉황대 일원에 대한 조사에서는 조개더미와 주거지 폐기장 유물포함층 등이 확인되었는데 동쪽 사면을 제외한 전 지역에서 확인된 조개더미는 A.D 3~6세기에 걸쳐 형성된 것이며 군집을 이루는 주거지는 3~6세기대의 장기간에 걸쳐 축조된 것입니다. 유적의 규모는 5098㎢ 입니다.

 

자료제공 : 김해시

포스팅날짜 : 2014. 4. 19.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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